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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계단 - 김충규

2002.10.14 17:06

윤성택 조회 수:1312 추천:192


우체국 계단/ 김충규 /교육부 교육마당21(8월호)



        우체국 계단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감상]
이 시를 읽으면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옵니다. 이 잔잔한 따뜻함은, 아마도 가을이라는 쓸쓸한 정조에 울림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은 이마에 그렇게 물결무늬 소인을 늘려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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