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는 첫 번째 골목/ 고찬규 / 『문학사상』 11월호(2002)
겨울이 오는 첫 번째 골목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간힘을 써보지만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불빛, 뺨을 따라 하릴없다
꽃잎처럼 송이눈이 내리고
사내는 줄곧
주머니 속의 오렌지를 만지작거린다
가끔, 어깨에 쌓이는
기다림의 부피를 털어내곤 하지만
이내 가슴에 얹히는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은
시루떡처럼 쌓여간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며
엄지손가락이 조그만 불꽃을 튕겨올린다
이대로 재가 되는 것들과
부둥켜안고 어디론가 흘러가버릴
여직 날은 밝지 않았고
눈은 눈대로 내리고
가로등은 묵묵히
자신의 발등만을 비추고 있었다
[감상]
어저께 철없이 내리는 눈을 보았습니다. 소혹성처럼 텅빈 공간 안에 눈발을 흘리는 가로등 불빛, 제 밝기의 영역만큼 쓸쓸해집니다. 이 시는 풍경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애잔한 선율이 좋습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이 작은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바람을 막아올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