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정채원/ 96『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2002)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마리아나제도의 한 섬나라 언덕 위에서
        손을 대면 데일 듯
        주황빛 꽃불 활활 타오르던
        그 나무의 이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뿌리 속으로 숨어 들어간 불씨 하나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던 작은 틈입으로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수액
        더 이상 흐를 곳을 찾지 못해
        열에 들뜬 팔다리를 찢고 터져 나가던 열꽃
        돌기둥처럼 어둠 속에 서 있던 나무의 전신이
        마침내, 하나의 불기둥이 되었을 때
        무심한 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
        내게로 실어보내던 그 뜨거운 체취
        홀린 듯 다가가
        그 나무 아래서 몸을 떨며 서성이던 나
        소스라치며 몸서리치며 그 나무 밑을 빠져나온 건
        얼마나 시간이 흐른 뒤였을까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도망치듯 멀어지던 나를 가여운 듯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나무의 이름을

        요즘 부쩍 오한이 잦다
        어느 틈에 내 몸 속으로도
        불씨 하나 숨어 들어온 것일까
        긴 잠복기가 거의 끝나 가는 것은 아닐까
        몸이 뜨거워질수록 더 추운 세상 언덕에
        불꽃 잔뜩 매단 채 서 있고 싶은 걸까




[감상]
좀 찾아보았더니 이 시에 등장하는 나무 이름은 '불꽃나무(flame tree)'라고 하는군요. 낯선 이국에서 발견한 나무 한 그루가 이렇게 한 시인의 시혼에 조용히 물듭니다. 나무 안의 뜨거운 불씨가 수액을 타고 가지로 옮겨간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또 그렇게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을 육화 시키는 마무리도 좋고요. 마음 불씨 하나 품고, 제가 쓰는 시의 화두이기 때문에 더더욱 눈길을 붙들고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51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050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07 178
1049 민들레 - 이윤학 2001.06.13 1803 285
1048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1 283
1047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5 207
1046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794 190
1045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08.19 1792 197
1044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1] 2006.08.17 1791 196
1043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789 128
1042 벽 - 유문호 [1] 2006.04.25 1786 219
1041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2] 2005.12.10 1785 217
1040 안녕 - 박상순 [4] 2007.06.20 1784 139
1039 이 골목의 저 끝 - 정은기 2009.04.09 1782 123
1038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1 327
1037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36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1] 2005.05.06 1778 221
1035 감나무가 있는 집 - 김창균 [2] 2005.09.28 1775 222
1034 사랑 - 김상미 2003.08.14 1773 161
1033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1] 2003.11.24 1771 204
1032 흙의 건축 1 - 이향지 2015.05.11 176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