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 김승원 / 2002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 당선작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1.
젖줄을 토해낼 때마다 허공에 다리가 놓인다 격자무늬 그물 사이로 굵은 바람만 빠져나갈 뿐,
거미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2.
모두 마을을 떠난 후, 여뀌며 끈끈이주걱, 바랭이가 무성한 빈집엔 도둑고양이와 생쥐가 떠나
고 없다 밤이면 달빛을 풀어 추녀와 젖은 굴뚝 사이 무당거미가 슬그머니 나와 집을 짓는다 연
통의 온기가 식어가면서 거미들은 재빨리 세간과 주민등록을 옮기고 이 집의 새 가장이 된 것
이다 이제 거미는 썩은 대들보 살집을 파고 들어가 이 집의 내력과 가훈을 갉아먹는다 이 집엔
원래 실직한 사내가 귀향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밤 기차를 타
버리고 그때부터 허물어진 집터를 배경으로 거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집단 농장을 이루고 산
다
3.
무너진 것들을 배경으로 투명한 젖줄 풀어 길을 내는 저 무당거미의 삶, 여전히 팽팽하고 가파
르다
[감상]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시는 우리네 삶에 관한 모색이고 또 그것에 관한 이해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의인법을 위해 시인의 눈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 의인법은 울림이라는 채널 주파수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무당거미'를 통해 결국 '우리'가 보이지 않습니까?
여지없이 등줄기를 휘게하고,
그 찌릿찌릿함에 몸서리, 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