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 오탁번/ 『문예중앙』2003년 봄호
암각화
고령읍 양전동 알터 마을
산자락 큰 바위에 새겨진
청동기 시대의 암각화를 보러 갔었네
비바람에 다 지워진 암각화는
보일 듯 말 듯 젖무덤인 듯
갈대잎으로 가린 주자지인 듯
한사코 부끄러워 고개 숙였네
동심원 아득히 파문(波紋) 지는
흐린 암각화를
줌렌즈 카메라로 찍었네
암각화를 보고 나오다가
길 건너 밭에서 자지감자를 캐는
겨우살이마냥 앙상한 할머니를 보았네
청동기 시대로 성큼 건너간 듯
나는 밭두렁을 넘어갔네
할머니의 조그만 얼굴은
지나온 생애의 등고선(等高線)처럼
주름살 천지였네
씨감자 눈 하나씩 심었는데
이토록 실한 감자가 많이 달렸다네
선사시대의 사람처럼
수확의 설렘으로 일렁이는
할머니의 주름살!
태고(太古)부터 농경(農耕)은
이처럼 장엄한 의식(儀式)이었네
나는 줌렌즈 카메라로
자지감자 캐는 할머니를 찍었네
서울에 돌아와 사진을 뽑았네
흐린 암각화는 제대로 안 나오고
자지감자를 캐며 활짝 웃는 할머니!
할머니의 얼굴에 선명하게 찍힌
청동기 시대의 암각화!
해님과 달님에게 제사지내는
청동기 시대 우리 할머니의
구릿빛 얼굴이 환하게 떠올랐네
[감상]
이 시는 암각화 그 자체를 시적 탐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기보다는 '자지감자'를 캐는 할머니에 더 포커스를 갖습니다. '할머니의 조그만 얼굴은/ 지나온 생애의 등고선(等高線)처럼/ 주름살 천지였네' 표현의 새로움과 그 내용을 다시 암각화로 겹치게 하는 솜씨는 눈 여겨 볼만합니다. 오래 전 누군가에 의해서 그려진 암각화는 결국 할머니가 세월을 거치면서 제 스스로 그려 넣은 문양(주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명의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는 진실이라는 설정, 울림이 잔잔히 배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