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쓰다」 / 심재휘 / 97년 『작가세계』로 등단
우산을 쓰다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 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감상]
'쓴다'의 두 가지 의미를 하나의 '비'로 풀어냅니다. 역시 지금 밖은 비가 내리고 있고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이 비가 '바싹 마른 나의 안부'를 적셔 주지는 않을까. 우산을 쓰거나 편지를 쓰거나, 비가 왔기 때문에 멈출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잔잔하게 그리움의 실체에 맞서는 서정이 좋습니다. 높던 하늘이 구름으로 낮아져, 마음 또한 무릎걸음으로 당신에게 가기 좋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