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밤이면 저승의 문이 열린다 - 김충규

2003.07.05 10:01

윤성택 조회 수:1056 추천:186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김충규/ 문학동네 (근간)


        밤이면 저승의 문이 열린다


        낮의 광휘를 쓸어모아 물을 끼얹어놓은
        일몰이 잔물결처럼 잔잔하다 눈먼 벌레들이
        그 속에 웅크려 가느다란 어둠을 배설하고 있다
        어둠들이 그물처럼 이승을 포위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격렬하게 파닥거리던 이승이 이내 잠잠해진다
        밤이 되면 저승의 문이 스르르 열려
        그 속에 서성거리던 영혼들이 이승으로 산책을 나온다
        낮에 고요해져 있다가 밤만 되면 슬프게 우는 나무가 있다면
`        그 나무 이미 저승 쪽으로 쓰러지고 있는 중이다
        새들 중에도 훌쩍 저승 쪽으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밤만 되면 숨결이 격렬해지는 사람 있다면,
        이미 그의 몸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둠이 출렁출렁 창궐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어둠이 숨결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니
        잠자다가 저승의 문을 연 내 할머니가 그런 경우다
        오래지 않아 죽을 자는 자신도 모르게
        제 죽음을 주위에 암시해놓는다
        그 암시는 어둠 속에서 더 예민해진다



[감상]
교보에 갔다가 반가운 시집이 있어 얼른 사고 말았습니다. 한 번 두 번 좋다 싶은 시를 읽은 기억이 있다면, 종로통 인파 속에서 단번에 친구의 뒤통수를 알아보듯 시집을 알아보기 마련입니다. 이 시는 초반부의 불빛에 뛰어드는 날벌레가 '어둠을 배설하고 있다'에서부터 '낮에 고요해져 있다가 밤만 되면 슬프게 우는 나무'는 '이미 저승 쪽으로 쓰러지고 있는 중'의 발상까지 시인만의 독특한 시선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렇듯 좋은 시는 상식적인 것을 태연하게 몰상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다시 일반적인 지식이나 판단력으로 이해하게끔 재배치합니다. 그 간극의 사이에 시인만의 '직관'이 존재하는 것이겠고요. 배울 것이 많은 시집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471 포도를 임신한 여자 - 장인수 2003.08.12 1055 180
470 새벽 세시 - 진은영 2003.08.09 1259 162
469 누와르론(論) - 박수서 2003.08.07 955 149
468 산란 - 정용기 2003.08.01 962 167
467 붉은별무늬병 - 홍연옥 2003.07.31 1027 181
466 골목길 - 박남희 2003.07.30 1352 192
465 후박나무가 있는 저녁 - 이영식 2003.07.29 1130 220
464 불안에 대하여 - 임동윤 [1] 2003.07.26 1198 184
463 구부러지는 것들 - 박용하 2003.07.24 1172 176
462 오래된 우물 - 서영처 2003.07.23 1150 189
461 조개 - 박경희 2003.07.22 1236 214
460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 이성복 2003.07.21 1317 190
459 광릉 뻐꾸기 - 배홍배 2003.07.15 1019 198
458 기침 - 이윤학 [1] 2003.07.11 1364 213
457 농담 - 이문재 2003.07.10 1325 211
456 고가도로 아래 - 김언 2003.07.09 1081 221
455 눈물 한 방울 - 김혜순 2003.07.08 1402 199
454 피라미와 피라미드 - 이승하 2003.07.07 978 196
» 밤이면 저승의 문이 열린다 - 김충규 2003.07.05 1056 186
452 신발 - 최두석 2003.07.03 1282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