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는 흔적」/ 이민하/ 『문학마당』2003년 가을호
흔적 없는 흔적
안개의 거리 끄트머리에 모퉁이가 있네
옆구리에 빵냄새를 들이대고 붉은 피톨을 터는 빵가게가 있네
맛보지 못한 무수한 빵의 종류와
이끼로 뒤덮인 축축한 티브이가 있네
종일 생중계되는 수족관이 있네
날마다 여자들을 갈아끼우는 유리창이 있네
천천히 유리창을 닦다가 주방으로 사라지는 여자들이 있네
안개에 절인 여자들을 곱게 갈아 반죽을 빚는 주방이 있네
문드러진 음부까지 바삭하게 굽는 토스터가 있네
비닐 포장된 여자들을 오토바이에 실어
어디론가 발송하는 하루가 있네
오토바이가 첨벙거리며 횡단하는
샛노란 고름 투성이의 저수지가 있네
울렁거리는 새벽비에 나뭇잎들을 토해내는 가로수가 있네
유리창에 튄 녹색 토사물을 씻어내는
오늘 처음 배달된 여자가 있네
여자가 엎드려 닦는 바닥에
기억 속으로 전송된 여자의 남겨진 핏자국이 있네
그걸 무심히 바라보는 창밖의 여자가 있네
그녀들을 이야기하는 시 쓰는 여자와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시 읽는 여자가 있네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길모퉁이가 있네
손을 대면 사라지는 한 칸의 유리가 있네
[감상]
유리창 보이는 빵가게와 횟집 풍경이 이채롭습니다. '종일 생중계되는 수족관', '날마다 여자들을 갈아끼우는 유리창'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을 직관해내는 흐름도 좋습니다. 안개가 끼듯 여자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노래를 부르듯 흥얼흥얼 여자를 살피게 됩니다. 참 호감 가는 시입니다.
아하, 유리창의 정체는 수족관이었군요!
첫 번 읽었을 땐 왜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
이제 좀 이해가 잘 되는군요!
충분히 읽지 않으면 복잡하고, 어려운 시는
아직도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