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안도현/ 『시와정신』2003년 가을호
굴뚝
1
아궁이에서 굴뚝까지는
입에서 똥구멍까지의
길
비좁고,
컴컴하고,
뜨겁고,
진절머리나며,
시작과 끝이 오목한 길
무엇이든지 그 길을 빠져 나오려면
오장육부가 새카매지도록
속이 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밑바닥에 닿는다, 경우
2
저 빈집의 굴뚝을 들여다보면
매캐한 슬픔이 타는 아궁이가 있을 것 같고, 아궁이 앞에 사타구니 벌리고 앉아
불을 지피는 여자가 있을 것 같고,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눈가의 주름을 핥을
것 같고, 아이들은 대여섯이나 바글바글 마루 끝에서 새처럼 울 것 같고, 여자
는 아이들 입에 뜨신 밥알 들어가는 것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릴 것 같고,
3
그러나 지금은 굴뚝의 비애는
무너지지 않고 제 자지를 세우고 있다는 거
쌀 안치는 소리,
끝없이 잉걸불의 열정,
환한 가난의 역사도
뱉고 토해낸 지 오래 된
저 굴뚝은 사실 무너지기 위해
가까스로 서 있다
삶에 그을린 병든 사내들이
쿵, 하고 바닥에 누워
이 세상의 뒤쪽에서 술상 차리듯이
[감상]
시를 통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의 상상력은 항상 발견의 자세로 열려 있습니다. 굴뚝을 통해 추억되는 풍경들과 함께 후반부 '굴뚝의 비애는/ 무너지지 않고 제 자지를 세우고 있다는 거'가 아무래도 재미있습니다. 어찌보면 상스러울 수도 있는 이 발설이 도도하고 고매한 시의 정형을 깨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좋은 시가 사람을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