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소풍」/ 오자성/ 『현대시』2003년 10월호 신인추천작품상 中
그리운 소풍
초등학생 때 몰래 사모하던 여신(女神) 같은 선생님 따라
소풍길 두근두근 나서고 싶은 날,
딸이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사올 준비물 목록을 불러준다
너무 흰 햇빛은 때로 마약가루처럼 위험하다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을 일시에 백색으로 지워버린다
아빠, 아이스크림도 사와야 돼
가을 오후, 창 밖 나무들마다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색깔 없이 生을 연체하며 지내 온 사이에도
세상은 정시 운행을 하고 있었나
내가 세금납부도 연체하고, 아이 낳기도 연체하고
아파트 사는 일도 연체하는 사이
몸 안팎으로 끌고 다녀야 할 짐이 덕지덕지 불어난다
사이다, 삶은 계란만 들고 어디든 가볍게 소풍 가고 싶다
통사랑인지 통사정인지 가로막은
딱 세 번의 사건이 미수로 끝난 사이
청춘은 철길처럼 미끄럽게 꼬리를 감추었다
아빠 저녁 먹고 올 건지 물어 봐 아내의 배경음이 들린다
나는 예기치 않게 아버지를 물려받았다
나, 내가 아버지가 될 줄 정말 몰랐다
창 밖, 툴 툴 툴 소형 트럭에 짐을 싣고
낙엽도 몇 장 우표처럼 붙이고 한 가족이 어디론가 밀려가고 있다
아빠, 일찍 올 거지 전화를 끊는다
다시 연체 시켜 물려줄 아버지가 없어 편하다
그러나 지상의 소풍이 끝나는 날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어주고 싶다
늘 거기 있던 초등학교 교실처럼 다시 배우고 싶은 세상이라고
여선생님 크림 바른 얼굴처럼 눈 앞에 부시게 반짝이는
그리운 소리들이라고
내 몸으로 연체되어 상륙한 아름다운 신화들이라고
[감상]
솔직한 시상이 눈길을 끕니다. '예기치 않게 아버지를 물려받았다'라든지 '트럭 짐'에 '낙엽도 몇 장 우표처럼 붙이고'의 표현도 좋고요. 퇴근길 딸아이의 전화로 확대되는 상상력과 그런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적 시선도 정감 깊습니다. 이런 시가 마음에 드는 걸 보니 노총각의 바바리, 가을은 가을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