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앉았던 언덕 버리고」/ 장혜승/ 『현대시학』2003년 10월호, 신인당선작 中
오래 앉았던 언덕 버리고
작은 지붕이 전부인 교회 나무십자가 외롭다
열애중의 고추잠자리 스스로 못 박아 더 붉다
나는 오늘도 어제같은 누더기로
이 언덕에 앉아
벗은 십자가를 내려다 본다
서쪽으로 팔 벌린 십자가 피를 말리고 섰다
온몸 불덩이 된 고추잠자리
힘센 날갯짓으로 시퍼런 하늘 휘젓는다
하늘이 끓기 시작한다
십자가에 박혔던 구름들 뭉텅뭉텅 타오른다
나는 오래 앉았던 언덕 버리고
십자가 꼭대기로 나를 던진다
내 몸 속 깊숙이 날아든 교회당
아맨 아맨 아맨
나를 친다
[감상]
교회당이 있는 해지는 언덕에서 오래 앉아 있었군요. 저녁놀과 '피'의 결합, 그리고 고추잠자리, 종소리 등의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멘'과 '아맨'의 차이조차 이 낯선 풍경과 조우해볼만한 배려입니다. 언덕은 쓸쓸한 그녀의 어깨선 같습니다.
먼 시선으로 그를 다시 봐야겠어요.
제 눈엔 왜 이런 것들이 안보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