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2003.11.24 12:03

윤성택 조회 수:1774 추천:204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 여림 / 작가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감상]

여림 시인의 유고시집, 그의 숨결이 문장 행간 행간마다 새어나옵니다.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그가 그 후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은 채 2002년 겨울 남양주 어느 아파트에서 죽기까지, 뜨거웠지만 외로웠던 청춘의 무늬가 그 활자입니다. 시인은 떠났지만 그의 영혼은 살아서 살아내고 있는 우리를 머무는 것만 같습니다. 잠시,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431 의무기록실의 K양 - 문성해 [1] 2006.07.19 1367 202
430 반성 16 - 김영승 2001.09.03 1278 203
429 나무기저귀 - 이정록 2001.10.23 1207 203
428 12월의 숲 - 황지우 [3] 2001.11.07 1601 203
427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2002.01.08 1146 203
426 귀신이야기1- 김행숙 2002.07.31 1511 203
425 에덴의 동쪽 - 김상미 2002.11.29 1254 203
424 봄날 - 심재휘 2004.03.25 1710 203
423 옛 골목에서 - 강윤후 [1] 2004.10.26 1703 203
422 오조준 - 이정화 [1] 2004.12.06 1065 203
421 그리운 이름 - 배홍배 [1] 2005.07.08 1908 203
420 누가 사는 것일까 - 김경미 2005.08.16 1956 203
419 고별 - 김종해 2001.09.05 1215 204
418 길에 홀리다 - 백연숙 2002.07.25 1166 204
417 하수구의 전화기 - 김형술 2002.10.04 1026 204
»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1] 2003.11.24 1774 204
415 눈 반짝 골목길 - 정철훈 [1] 2004.10.12 1204 204
414 가구의 꿈 - 조덕자 [1] 2004.12.21 1194 204
413 꽃의 흐느낌 - 김충규 2005.06.09 1897 204
412 기차 소리 - 심재휘 [1] 2005.06.15 1589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