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계절」/ 조연호 / 시작 2003년 겨울호
죽음에 이르는 계절
팔뚝 위를 눌러 희미하게 돋는 실핏줄에 입 맞춘다. 감사한다, 펄펄 뛰는 피
톨들도 가져보지 못하고 이제 입춘(立春). 산책길의 태양은 헐렁한 양말처럼
자꾸 발뒷꿈치로 벗겨져 내리고 붉은 잇몸을 보이며 어린 연인이 웃는다. 그
날은 군대 가서 죽은 사촌형이 내 뺨을 쳤고 물 빠진 셔츠 얼룩을 닮은 구름
이 빨래줄 위를 평화롭게 걸어갔다. 마지막 인과라 생각하며 문 열어두었던
붉은 봄날. 감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3권, 5∼6세기 낙동강 유
역과 한강 유역 근처에 개미 떼들이 커다란 구멍을 슬어놓은 봄날. 골목의 버
려진 상자마다 바람의 손가락들이 채워진다. 화장실에 앉은 여자들이 노란
열매를 먹고 노란 빛으로, 푸른 알약을 먹고 푸른빛으로 변하는 리트머스페
이퍼였던 봄날. 연인의 목 안에서 바람이 방부제처럼 녹아갔다. 감사한다, 인
간이라는 짐짝. 짐짝이 점점 무거워질 때 바람의 거짓말이 푸석푸석 아름다
워져 간다. 사람들의 발목에서 넓고 가벼운 날개를 꺼내던 마술의 立春. 감사
한다, 맑은 정오에 구릉을 지나던 객차와 화차 사이에 어린 아이가 끼어 죽은
날.
[감상]
기묘한 이미지로 입춘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그래서 낯선 상상력이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고요. 중간 중간에 '감사한다'란 문장이 배치됨으로서 이 시 '죽음'이 갖는 관념을 희석시킨 듯 싶습니다.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경계를 허물고, 봄이라는 계절성과 맞물려 풀어내려는 시상 흐름이 인상적입니다.
긴 머리를 묶고 기타를 퉁기던 스물 언저리의 그.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