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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한 쓸쓸함에 대하여 - 정주연

2004.01.10 13:38

윤성택 조회 수:1313 추천:191

「안온한 쓸쓸함에 대하여」/ 정주연/ 2000년 《시안》으로 등단


        안온한 쓸쓸함에 대하여
        

        
        오랜만에 찾아 온 헛간이 생각보다 안온하고 편안하다
        길게 누워 벽에 새겨진 흔적들을 바라보다가
        흩어진 어둠 속 잔광이
        벽에 새겨놓은 말들이 소근대며
        나를 불러들인 것을 알았다
        5시에 멈춰선 괘종시계의 추 소리가
        귓가에 분명히 뎅그렁거린다
        허공을 미세한 파장으로 맴돌던 생각이
        잠시 머뭇거리다 짚더미 수북한 구석에 내려앉는다
        햇빛이 헛간에 가득할 때는
        마음에도 황금빛이 흘러 넘쳤지만,
        벽에 걸린 농기구가 녹슬어가듯이 세상을 떠도는 사람도
        바람 불면 잠시 잠깐 삐걱거리는 먼 거리 바라볼 것이다
        오래 비어서 휑한 제 속 드러낸 헛간에서
        햇볕 한 줌 바스락대는 짚더미가
        쓸쓸한 편안함임을 애써 숨기진 않겠다
        그래, 이제 제대로 보인다
        한세상 돌아온 마음에 거미줄 쳐진 것을 본다
        버석거리는 날의 위태로움이 거미줄에 간댕거린다
        천정에서 흘러내리는 햇볕들을
        거미가 모처럼 탄다



[감상]
좋은 시를 만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토요일표 햇살은 이처럼 고요하고 적적한데, 이 시가 안내하는 헛간의 햇살은 황금빛입니다. 헛간의 풍경을 서정에 그치지 않고 화자의 내면과 부드럽게 소통되는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이렇듯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 어딘가 이런 고요가 우리를 살만하게 만들 것입니다. '한 세상 돌아온 마음', 그 쓸쓸함이 편안한 토요일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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