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부르는 사람」/ 길상호/ 《문학마당》2003년 겨울호
상처가 부르는 사람
도마 위에 쓰다 남은 양파 조각들
아침에 보니 그 잘린 단면에 날벌레들이
까맣게 앉아 있다, 거기 모여 있는 벌레들은
식물의 먼 길 바래다 줄 저승사자,
검은 날개의 옷을 접고 앉은 그들에게
칼자국이 만든 마지막 육즙을 대접하며
양파는 눈을 감는다 가슴에 차오르는 기억을
날개마다 가만히 올려놓는 중이다
매웠던 삶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양파는
팽팽했던 긴장감에서 벗어난다
벗기려고 애써도 또다시 갇히고 말던
굴레를 이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나에게도 상처가 불러들인 사람 있었다
그때 왜 나는 붉은 핏방울의 기억을
숨기려고만 했던 것일까 힘들게 온 그에게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하고 혼자
방문 닫고 있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지금 더욱 난감하게 갇히고 마는 것이다
속으로 혼자 썩어 가고 있는 중이다
[감상]
도마 위에 썰어져 방치된 양파를 보면서 시인은 어느덧 그를 생각해냅니다. 양파가 갖고 있는 속성과 느낌이 잔잔한 필치로 진솔하게 읽히는 이유는, 작위성이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시인의 눈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처가 불러들인 사람', 내 상처로 말미암아 알게된 사람, 그를 보기 위해 여는 겹겹의 방문은 또 눈물입니다. 그래서 양파는 달기 이전에 아린, 난감한 슬픔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어디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