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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택시 운전사 - 서동욱

2004.02.06 14:32

윤성택 조회 수:1204 추천:212

「한밤중의 택시 운전사」/ 서동욱/ 1995년 《세계의 문학》봄호로 등단



        한밤중의 택시 운전사

                   ― 상상해 본 나의 죽음
        
                
        급기야 택시 운전사는 파출소에 전화한다
                
        대문 앞에 나온 아내가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술 먹고 차 타면 꼭 멀리 돌아오는 것 같은데
        어떻게 요금을 순순히 낼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시비 걸며 살다가
        언젠가 나는 택시 운전사에게 맞아죽으리라
        택시는 방향을 틀어 산으로 오른다
        비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운전사는 헤드라이트마저 끈다
        안 내리려고 하지만 그의 억센 손에 머리카락이 잡히고
        아야 아야, 두피가 뜯겨져 나갈 것만 같다
        그제서야 분기탱천한 기개는 온데간데없고
        형 한번만 봐주세요
        따블 드릴께요
        빌기 시작한다 그러나 옆구리에 사정없이
        통증이 스며들고, 나는 드라이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목에 한방 배에 한방
        얼굴에 한방
        
        그리곤 기억이 사라지겠지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일단 트렁크에 시체를 실어 집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큰 비료부대 같은 걸 찾아본다, 없다
        욕실에서 뼈와 고깃덩이를 작은 조각으로 자른다
        (그의 머리 속에 문득 고향에서 덫으로 잡은 노루를
        친구들과 한 조각 한 조각 칼로 저미던 흐뭇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아내는 양동이에 걸레를 담아 가지고 와
        열심히 치운다
        애들은 진짜 노루 고기 사온 줄 안다
        자 다 되었다
        이제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가
        매일 아침 한 봉지씩 버리면 된다
        애들이 꺼내 먹기 전에.
        
        미안하다 택시 운전사여
        내가 시비 걸고 싶었던 놈들은 조(趙)엑스와 김(金)세모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헌법(憲法)인 그들에게 시비 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산으로 끌고 가고 싶었던 놈들
        드라이버로 푹푹 찌르고 싶었던 놈들은 그 존경받는 조(趙)와 김(金)이다
        그런데 쫄짱부인 내가 어떻게……
        
        아아 위대한 택시 운전사여
        너는 내가 감히 하지 못한 것을 다 해버렸구나
        그래, 사람은 모름지기 하고 싶은 대로하며 살아야 한다
        아 사람 백정이여! 선각자여!
        다음번에 네 택시에 조와 김이 타기를,
        할증 때문에 시비가 붙기를
        그래서 네가 그들을 조용히 山으로 안내하기를……
        


[감상]
가볍지 않은 소재인 살해가 시의 중심이 되는 시입니다. 섬뜩할 정도로 서사에 힘이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택시운전사와 실랑이를 할 경우가 있겠지요. 이 시의 뒤편에는 직장상사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말단직원의 비애, 그리고 막차를 놓칠 때까지 마시는 술, 그리하여 괜한 화풀이 같은 시비, 이 모든 것들이 각기 개연성과 상상력으로 살해자와 공범이 됩니다. 불편할 정도로 내용이 강렬해 하루 종일 이 시가 뇌리를 쫓아다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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