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 배용제/ 《이 달콤한 감각》/문학과지성사(근간)
홀로코스트
- 1999년 7월 어느 날, 씨랜드 수련원에서 수십 명
의 아이들이 홀로코스트되었다. 그때 어둠은 고요
했고 어디선가 술잔들이 건배를 하거나, 음악이 흐
르거나, 수많은 정자들은 수정을 향해 몰려갔다
불꽃이,
불꽃 속의 신들이
아이들의 잠을 고스란히 먹어치운다
텅 빈 잠의 껍질 안으로 눈부신 어둠이,
활활 타오르는 어둠이 밀려온다
말랑말랑하고 얇은 껍질들이 달구어진다, 딱딱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불꽃은,
불꽃 속의 신들은 잘 구어진 잠부터 골라 먹는다
검은 트림이 공중으로 솟구친다
멀리서 창백한 달이 사이렌을 울린다
땅의 위의 모든 잠들이 소스라치며 깨어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비어버린 잠 주머니를 들고 눈 비비며 운다
부스러기 잠을 주워 담는다
애써도 달콤하고 순한 잠은 채워지지 않는다
다시 아이들을 눕히는 잠은 맵고 뜨겁다
딱딱한 잠의 껍질 안 아이들이 채워진다
불꽃의,
불꽃 속 신들의 한 끼 식사가 끝난 곳
검고 푸석푸석한 배설물이 가득하다
거기에서도 아이들은 잘 잔다
* 홀로코스트 : 산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
[감상]
참 기다렸던 시집입니다.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시집에서 보았던 전율이 고스란히 옮겨옵니다. 지금껏 시를 공부하고 써오면서 관념과 추상어를 섬세하게 다룰 줄 아는 시인은 배용제 시인이 단연 최고로 생각됩니다. 이 시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홀로코스트라는 상상력으로 재현해냅니다. 시집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시선의 확대, 우주의 질서를 시로 옮겨오는 탁 트인 상상력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인의 행보인 듯 싶고요. 시에 있어서도 죽음을 다루는 것은 마약처럼 달콤합니다. 주위에서 아직도 중독자처럼 죽음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시인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 시집이 죽음을 뚫고 나간 지도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