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2002년 경남일보 신춘 당선작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에 걸려있던 햇살이
누구의 집이었던
쓸쓸한 마당 한 귀퉁이에 툭 떨어지면
윗채가 뜯긴 자리에
무성한 푸성귀처럼 어둠이 자라나고
등뒤에서는 해가 지는지
신도시에 서있는
건물 유리창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감상]
이 시는 사물에 대한 감정이입이 잘 이뤄진 시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 제각기 움직임과 생각을 불어넣고 도시화 되어가는 변두리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봄을 맞고 있는 풍경들이 쓸쓸한 문양으로 남습니다. 곧 철거가 이뤄지면 그것들은 어디로 사라져갈까. 또 영영 이별해야 하는 것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