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못하는 저녁」 / 이병률/ 《신생》2003년 여름호
아물지 못하는 저녁
눈발이 쏟아지는 길을 걸어 식당을 찾아냈다. 아무도 없는 식당안을
채우고 있는 소란스러운 냄새, 냄비에 뭔가 끓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
려도 주인은 오지 않고 내심 끓고 있는 냄비에만 마음이 쓰였다. 시장
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뭔지 모를 그것이 다 졸아 타버리면 어쩌나 하
는 마음에 뚜껑을 여니, 두 줄로 포개어져 끓고 있는 두부에 붉은 물
이 들고 있었다. 끓으면 넣으리라 생각하고 썰어놓았을 도마 위의 파
한 뿌리, 그것을 내려다보며 넣으리라 생각하고 썰어놓았을 도마 위
의 파 한 뿌리. 그것을 내려다보며 주인의 부재를 다시 한번 느낄 즈
음엔 이미 파를 냄비 안에 집어넣고 난 후였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
숟가락을 들어 찌개 맛을 보고 있는 나.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주인은 어딜 간 것일까. 객
이 냄비를 다 비우고 나서도 오지 않는다면 어쩔 텐가. 물기가 내려앉
아 얼기 시작한 창문 밖으로 눈발은 그치질 않고 식당 안으로는 문을
닫아 걸어야할 것만 같은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감상]
냄비 속 절박함이 참 쓸쓸하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눈이 한없이 내리는 날, 주인 없는 식당 풍경이 오롯하고요. 이런 분위기를 시로 옮겨올 줄 아는 섬세한 마음이 눈길을 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