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림에 대하여」 / 정병근 / 《실천문학》2004년 봄호
그을림에 대하여
그는 어딘가 그을려 있다
불구덩이 속에서 반쯤 타다가 나왔다
사타구니에 우둘두둘한 화상을 숨기고 있다
입가에는 무언가를 구워먹은 흔적이 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도 그을려 있다
그의 집은 그을음 투성이다
그는 벌겋게 불을 지피다가
집 한 채를 홀랑 태워먹은 적이 있다
방화의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그의 얼굴
그가 앉았던 방바닥과 기댔던 벽과
누워서 쳐다보았던 천장까지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그는 집 한 채를 버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버리고 온 빈집엔 잡초 무성하고
무너진 담장과 굴뚝과 기둥과 서까래가
햇볕에 한없이 그을리고 있다
그을린 곳마다 눈부시는 거미줄
그을음을 툭툭 털면서
그가 오래된 구들장을 열고 나온다
[감상]
연기가 천장이나 벽에 엉겨 검게 낀 그을음. 이 시는 한 사내의 삶을 '그을음'이라는 필연으로 몰고 가는 조형력이 돋보입니다. 이런 긴장된 사유의 끝에는 '햇볕에 한없이 그을리고 있다'는 직관의 힘도 한몫 합니다. 지난한 삶의 내력을 이처럼 그을음으로 점철시킬 수 있다는 것은, 주제를 꿰뚫어 내는 날카로운 시선이 있기 때문인 듯 싶군요. 지금 밖은 꽃나무들이 햇볕에 그을려 화상의 자리마다 꽃 흔적이 생겨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