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의 달」/ 김혜영/ 『현대시』 1997년 등단
벽 속의 달
3천년 전, 눈알이 붉은 그 남자
동굴 벽화 안에 화석처럼 갇혀 살았다
늑대는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다
하늘에 걸린 노란 달을 삼켰다
유령 늑대들은 샤워를 끝낸 후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서두른다
회사의 자동문이 스르르 열리고
엘리베이터가 스르르 닫힌다
그녀의 가슴에
달린 두 개의 둥근 달
늑대는 벽 안으로 그녀를 안고 들어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벽 속에 갇힌 달과 늑대
술집에서 하이트 맥주를 마시다 잠들어
꿈속에서 늑대는 그녀를 벽 바깥으로 밀었다
절벽 아래 시퍼런 바다가 누워있었다
그 남자의 벽 사이로 금이 가고
그 틈새로 노란 민들레가 피어났다
민들레는 날아올랐다
[감상]
강렬한 이미지가 인상적인 시입니다. 벽화 속 사내의 눈과 늑대, 달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3천년 전 벽화를 생생하게 살려냅니다. 눈 여겨 봐야할 대목은 '유령 늑대'의 쓰임인데, 여기서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현대사회에 나타난 정도가 어울리겠다 싶습니다. 이는 벽화가 지니고 있는 영속성을 영혼의 것과 결부시켜, 끈질긴 생명력을 담보해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달의 둥근 이미지, 꽃 진 후 번식을 위해 날아오르는 갓털 민들레 씨앗은 늑대 갈기 모양이라고 해도 될까요. 대전에서 날아오른 민들레 씨앗이 한강 둔치에까지 날아온다는 사실, 그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이 민들레 씨앗입니다. 3천년 전 너머에서 이렇게 시가 불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