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민박, 편지」/ 김경주/ 『대한매일』 2003년 신춘문예로 등단
폭설, 민박, 편지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들을 만지고 있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처럼 쌓여갔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쓰다만 편지지로 소금바람이 하얗게 쌓여 가는 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움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쓸쓸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푹푹 끓기 시작하고
방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피 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나 아닌 곳에 가서 쌓이는 가혹한 삶의 은유인가
눈발은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 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혹성같은 낱말들을
편지지에 별처럼 새겨 넣곤 하였다
[감상]
캄캄한 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나, 밤기차 차창에서 읽었음직한 시입니다. 마음의 주파수는 왜 이리 애잔하게 흐르게 하는지,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온기는 감성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곳곳 문장마다 소재들의 긴밀한 호응관계는 이 시의 빼어난 풍경을 돋보이게 합니다. 바닷가 민박집에서 밤새 바다와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파도가 불러 준대로 삐뚤빼뚤 엽서 한 장 쓰고 싶은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