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길을 걷는다」/ 이대흠/ 94년 <창작과 비평> 봄호로 등단
그녀와 길을 걷는다
그녀와 길을 걷는다 나는
샌들을 신었고 그녀는 구두를 신었다
또각또각 그녀 발자국 소리
내 가슴 속 길을 뜨겁게 달군다 그녀와
길을 걷는다 내 옷은 왼쪽에 단춧구멍이 있어
언제나 오른쪽이 들린다 그녀는 늘
나의 오른쪽이다 간간이
단추와 단추 사이 벌어진 틈으로
그녀의 속이 보인다 그녀는
왼쪽이 열려 있다 조금씩 브래지어가
보이고 가슴의 흰빛이 보인다
열린 곳끼리 마주 보이고
이렇게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속엣 것을 조금씩 보여주곤 한다
함께 간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을 들추어보기도 하는 것
슬쩍 훔쳐보고 못 본 척하며 그녀와 길을
걷는다 벗거나 벗기면 길을 갈 수 없어서
더 이상 속을 헤집지 않으며
그녀와
[감상]
남자와 여자의 단추 채우는 위치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는 시입니다. 여자의 블라우스 단추를 누군가 채워줘야 한다면 지금의 왼쪽 단추가 편한 걸까요. 이 시는 그런 상식의 순간을 시적 상상력으로 포착해냅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 그녀를 반드시 오른쪽에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야흐로 겨우내 두툼한 옷으로 가렸던 허리선이, 싱싱하게 살아나는 계절입니다. 갑갑한 단추 하나쯤 풀어 좀 시원해져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시인의 감상글이 더 가슴을 치네요
어느 봄날의 길을 따라 나도 함께 발걸음을 하는 듯 경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