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 이종욱/ <창작과비평사> 시인선 (1981)
들풀
들에 나가면 비로소
서로 끌어안은 뿌리들이 보인다
강물 쪽으로 외롭게 내린 뿌리들이
속살 찢어 서러움 빚어내며
죽음마저 고이 갈무리하는 풀잎들이
그리고 작은 들풀보다 더 작고
지킬 것 많아 애타는 허수아비들이
미친 바람 만나면
작은 꿈을 빼앗기고
눈물 한방울까지 돌려주고
더 큰 꿈이 자라고
폭설이 내린 다음해 봄에
잎은 더욱 푸르다
하늘이 푸른색을 걸쳤으므로
몸서리칠 때에도
무서움이 아니다 한밤은 단지
대낮으로 가는 길목일 뿐
들에 나가면
가슴을 던지는 푸른 두 눈이 보인다
입술을 땅에 대어본 자만이
얼음 아래 다스한 불을 숨겨둔 자만이
마주볼 수 있는 두 눈이
사람을 얼어붙게도 하고
다시 깨어나게도 하는 두 눈이
옷깃에 새벽 이슬 묻혀본 자
굴러떨어지며 맑게 부서지는 비밀을 알며
날카로운 풀잎에 손을 베인 자
작은 칼을 품에 간직하며
들에 나가면 비로소
노을의 살점 머금은 들풀이 보인다
가쁜 숨 몰아쉬며 버티는 뿌리들이
[감상]
언제부터인가 시에서 역사성은 사라지고, 스스로의 내면으로 물러앉게 되었을까요. 이 시는 세상과의 대결로서 80년대 군부독재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도 새록새록 다시 읽히는 이유는 이 시가 담아내고 있는 '서정'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홈페이지 <좋은시> 1번 작품 92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작 '꽃피는 아버지' 작품 중 '강물 쪽으로 외롭게 내린 뿌리들이/ 속살찢어 서러움 빚어내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시의 3·4행과 똑같군요. 오늘 참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미처 이해 되기도 전, 습관처럼
시인님의 감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 비로 인해 좋은 시 하나 꼭 낳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