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소주병》/ 공광규/ 실천문학사 시인선 (2004)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감상]
아버지와 술병과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시입니다. 자기 속을 비워내며 가족에게 채워주는 아버지. 그러면서 세월 속에 방치되는 묵묵한 아버지. 술 안에서 당당하다가도 술 밖으로 깨어나면 무기력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이미지를 이 시는 '빈 소주병'으로 눈물겹게 바꿔냅니다. 깡소주 마실 줄 알면 제몸이 비어 있다는 걸, 아버지처럼 깨닫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