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잠」/ 이하석/ 《현대시학》2004년 5월호
빈 잠
깊이 비워버린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얕았나? 그 빈병과
나란히 입 벌리고 잔다
뒤척이면서 푸르스름한 기운에 싸인 몸
추스린다 때로 허리 꼬부리면서
꿈나라의 해석 안 되는 말을 짧게 내뱉는다
그가 헤적이기 싫어하는 비닐 봉투를
바람이 너덜너덜하니 열어놓는다
거기 비져나온 망치와 드라이버, 노란 칠 한 군대식 물통은
그의 내일 아침을 기대하지 않는 듯
완강하게 빛난다
새벽 두 시 지나 대합실 떠도는 잠못 든 불빛들
그의 머리맡 뒤적이다 사라진다
꿈이 얕으니 더 뒤질 것도 없다
바람도 더 이상 그의 꿈과 현실을 파헤치지 않는다
이미 다 열려버려서
아침이 와도 늦게까지 그 자신을
여미지 못할 것이다
[감상]
빈병을 빈잠으로 바꿔내는 초반부가 인상적입니다. 또 비어 있음의 직관이 빈병, 비닐봉투, 더 나아가 대합실로 확장되는 시선도 눈여겨볼만 하고요. 좋은 시의 매력은 이처럼 그 안에 새로운 발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 느끼지 못한 것을 드러냄으로써 울림이라는 시적 감흥이 우러나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