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 잘했다」/ 이상국/ 《현대시》2004년 5월호
오길 잘했다
어느 날 저녁 동네 골목길을 지나다가 자즈러질 듯 우는 갓난애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 누군가 새로 왔구나
그리고 저것이 이제 나와 같은 별을 탔구나 하는 즐거움
상당히 이름이 나있는 시인의 시를 읽다가 야, 이 정도면…… 어쩌고 하는 이 희떠움
티브이 속에서 줄줄이 끌려가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꼴좋다 꼴좋다 외치는 즐거움
아무 생각없이 생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쓰다가
남 모르게 우주의 창고를 열어보는 이 든든함
때로 따뜻한 여자 속에서 내 그것이 죽어가는 즐거움
친구를 문상 가서 웃고 떠들다가 언젠가 저것들이 내 주검 앞에서 나를 흉보며
내 음식을 축내는 즐거움을 미리 보는 즐거움
어쩌다 공돈이 생긴 날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에 가는데
나무 이파리들이 멋도 모르고 바람에 뒤집어지는 걸 바라보며
아무래도 세상에 오길 잘했다는 이 즐거움
[감상]
이 별에 와 이별만 기념하던 날들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이런 시가 살만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소한 것에도 즐거움이 있고, 그 즐거움이 우주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단순히 유희적인 측면에서 보는 시선이 아니라 태어남과 죽음을 객관화시키는 것에서 오는 직관이 이 시의 깊이입니다. 오길 잘했다, 매번 이런 생각이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빛을 갖게 합니다. 그게 시인의 눈이 아닐까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