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문신/ 《현대문학》2004년 4월호
살구꽃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 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히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감상]
왜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시가 생각났을까요.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것이었다’의 어투가 백석의 시로 인해 매력적인 수사의 느낌을 갖습니다.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도 좋지만, 하필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을까 라는 강한 흡인력이 내내 인상에 남습니다. 살구꽃이 피고 지는 생태를 우리 삶의 부분으로 바꿔내는 잔잔한 흐름, 한 행 한 행 다시 읽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