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를 보는 남자」/ 안시아/ 《리토피아》2004년 여름호
비디오를 보는 남자
사내는 셔터를 올린 후 몸을 밀어넣는다
수거함에 들어있는 시간들이 빠르게 되감긴다
사내는 좀처럼 틀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
리모컨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거나
화면 속에 자신을 켜두곤 한다
일생을 꼬박 채울 일과며 잔업이다
쇼윈도는 오후가 상영중인 화면,
사내의 자전거가 쓰러져 허공에 바퀴가 들린다
바람이 배역을 맡은 모양이다
모든 테이프는 여전히 신프로를 예고하고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 예고편은
더러는 기대를 저버릴 것이다
사내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맥 풀린 동공 두 개처럼 감겨진 테이프들이
차곡차곡 책상에 쌓여간다
사람들은 재생단추 하나로 자신을
화면속에 가둬내기 위해 잠시
이곳을 들렀다가 발길을 서두를 것이다
창밖 헛도는 자전거 바퀴가 멈추지 않는다
검은 테이프 같은 그림자를 끌고
사내가 천천히 틀 밖으로 빠져나온다
[감상]
비디오테이프가 남자의 가게이자 남자의 화면입니다. 누군가 빌려보았을 시간을 되감으며 하루를 살아내는 무료함이 묻어나는 시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테이프를 일상의 것으로 비유해내는 치밀함도 돋보이고요. 자전거 바퀴, 동공, 그림자의 쓰임은 결국 우리가 살아내는 하루 또한 구프로가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사내가 가게를 빠져나오는 대목은 섬뜩하리만치, 스톱스위치에서 재생스위치로 넘어가는 테입의 건조한 움직임을 포착해냅니다. 머지않아 DVD에 밀려 비디오테이프는 사라지겠죠. 분명 테이프를 온몸에 휘감고 미라가 될 사내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