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도 달빛이 닿았습니다」/ 최재목/ 《시와반시》2004년 여름호
그곳에도 달빛이 닿았습니다
7월 외곽 한 모퉁이 푸른 달빛에 포도가 익어갑니다
달빛이 닿은 곳에는 모두 달 이야기로만 가득합니다
비 내린 뒤 잠깐씩 맑아지는 봇도랑의 무릎을 베고
찌그러진 포도알들도 달빛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제법
세상의 둥근 것들과 이야기를 나눌 줄 압니다
연표(年表) 같은 포도 이파리를 몇 장 넘기다
바람은 잠이 들고, 들판엔 조금씩 빗방울이 듣기 시작합니다
달빛이 갇힙니다, 빗방울은 푸른 관(棺)입니다,
조용히 포도알은 아름다운 무덤 하나 만들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달빛이 닿았습니다
[감상]
갑갑한 도시에서 이 시 한 편으로 여름 밤 포도밭에 도착했습니다. 아름다운 달빛과 함께 풋풋한 바람도 붑니다. 아직도 현대시가 서정과 응축의 형식을 져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는 이처럼 자연을 떠나 살아온 사람들의 먼먼 향수(鄕愁)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이런 시가 미덕으로 남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