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역」/ 조정/ 《다층》2004년 여름호
종각역
네가 먼저 알아보았다
노숙으로 얼굴이 부은 종각역에 통일호 열차가 닿았다
이십 오 년 만에
봉사대 에이프런을 입은 나에게 다가오던
너는 김밥을 받지 않고 5번 출구로 달아났다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바지 단을 뜯긴 아침이
날이 밝아
몸 둘 바를 모르고 식어가는 토사물을 피해 천천히
지하도 계단을 내려왔다
낡은 신을 벗어 얼굴을 가리고 싶은
절망도 한때는 올라가는 길만 찾아 걸었을 것이다
칠 벗겨진 펌프가 환하게 물을 퍼 올리는 여관 마당에서
흰 셔츠 바람으로
지도를 펼쳐보는 우리를 남겨두고
길이 앞서 떠났다
단 하나의 지도를 들고 서로 다른 길을 찾아 나섰으나
길 잃을 경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라면 박스 날개에 내 주소를 적었다
여기 세워 둔다
흰 머리카락이 나느라고 가르마 자리가 가렵다
참을 수 없이
입술이 뜨거운 단풍나무 두 그루를 싣고
통일호 열차가 이십 오 년 전에 정읍역을 떠났다
[감상]
이십 오 년만의 그와의 만남. 그것도 지하철 무료급식 자리에서 한 사람은 자원봉사자로 한 사람은 노숙자가 되어 만났습니다. 아마도 정읍에서 그와의 인연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때 키스를 나눈 사랑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화자는 그가 돌아오지 않아 라면박스에 주소를 적어 세워둡니다. 잔잔하면서 애틋한, 그리고 왠지 서늘한 슬픔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지나와 지도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 여정의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 한때 사랑으로 불렀던 사람들. 헤어진 날로부터 기차가 출발해 이처럼 어느 날인가 역에서 만날 때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