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라는 포장마차」/ 이정록/ 《문학예술 2004》
물푸레나무라는 포장마차
버스는 떠났네
처음 집을 나온 듯 휘몰아치는 바람
너는 다시 오지 않으리, 아니
다시는 오지 마라 어금니 깨무는데
아름다워라 단풍든 물푸레나무
나는 방금 이별한 여자의 얼굴도 잊고
첫사랑에 빠진 듯 탄성을 지르는데
산간 멀리서 첫눈이 온다지
포장마차로 들어가는 사람들
물푸레나무 그 황금 이파리를
수많은 조각달로 고쳐 읽으며
하느님의 지갑에는 저 이파리들 가득하겠지
문득 갑부가 되어 즐겁다가
뚝 떼어서 함께 지고 갈 여자가 없어서
슬퍼지다가, 네 어깨는 작고 작아서
내가 다 지고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늦가을
막차는 가버렸고, 포장마차는 물푸레나무 그림자로 출렁이는데
주인은 오징어의 배를 갈라 흰 뼈를 꺼내놓는데
비누라면 함께 샤워할 네가 없고
숫돌이라면 이제 은장도는 품지 않아
그렇지만 가슴속에서 둥글게 닳아버린 저것이
그냥 지상의 도마 위로 솟구쳤겠나
그래 저것을 나는 난파밖에 모르는 조각배라 해야겠네
너에게 가는 마지막 배라고 출항표에다 적어놓아야겠네
나에게도 함께 노 저어 갈 여자가 있었지
포장마차는 사공만 가득한 채 정박 중인데
물푸레나무 이파리처럼 파도를 일으키며
가뭇없이 사라져도 되겠네 먼바다로
첫눈 맞으러 가도 되겠네
[감상]
요즘 시를 읽으며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곤 합니다. 무엇이 새로운가? 딱딱한 상식으로 이 시대를 변통해온 삶에서 詩란 그야말로 '금요일은 한번쯤 바다로 퇴근하는'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버스로 떠나보낸 여자에게서 포장마차로, 물푸레나무로, 오징어 뼈로, 바다로 우리를 이리저리 데려다줍니다. 그 수고로움이 상상력으로 환한 숲길만 같습니다. 신선한 공기처럼 탁 트인 시입니다.
더불어 윤시인께도 감사드리고 갑니다. 이곳은 정말 스미듯한 좋은 커뮤니티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