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가족」/ 박판식/ 2004년 《창작과비평》여름호
그리운 가족
결점투성이 피와 피를 잇는 꽃과 나뭇잎
엉겨 붙은 혈관을 풀어 여덟 갈래로 소생하는 기적은 너무도 사소한 일
나뭇잎은 자라지 않는다 나뭇잎은 본래의 모양을 찾은 것뿐이다
그러나 병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나뭇잎들의 뼈가 서걱거린다 피가 도는 푸른 혈관이 보인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처럼 나는 희망의 기후를 감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균을 저울질하며 눈물이 부풀어오르진 않는다
바람은 나뭇잎들의 위태로운 차양을 찢어놓는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좀처럼 한 가지 생각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한랭의 기후를 견뎌낸 나무들을 누군가 전지하고 있다
그것은 갈고리 달린 창으로 발목을 끊어내는 고대의 살육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피가 솟구치는 일은 없다
누군가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잘 여문 나뭇잎이 불가분의 운명으로 떨어져 내릴 때
비명을 내지르는 것은 분명히 우스꽝스러운 일일 테니까
[감상]
나무와 육체와의 관계 모색이 뛰어난 시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나뭇잎은 자라지 않는다 나뭇잎은 본래의 모양을 찾은 것뿐이다'라는 문장도 눈길을 끕니다. 결국 이 시가 내재하고 있는 가족사는 전지작업처럼 상처와 상처 사이에서 겪어내는 삶의 단면이기에 깊이가 있습니다. 앙상하게 가지치기된 나무가 가족이 되고 그리움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무의 성장은 그런 상처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