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생각』 / 이규리/ <세계사> 시인선
재촉하다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도 있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서랍 속에
접어둔 언니의 봉긋한 브래지어는 내가 꿈꾼 조숙하고 달콤한 흥분이었다. 겨
우 밤톨만한 젖멍울이 생겼을 뿐인 내 가슴을 단숨에 수식했던 브래지어의 황
홀을, 밤마다 나는 재촉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저 브래지어의 우듬지에 닿기
를, 분홍빛 유두가 살며시 끝을 향해 긴장해 있기를. 그러나 재촉했던 지식,
재촉했던 사랑처럼 내 가슴은 그리 빨리 부풀지 않았고 언니의 에로틱한 브래
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
큼 나는 일찍부터 공허 같은 걸 품고 다닌 게 아닐까.
어디를 휘돌아 나왔는지 언덕과 낭떠러지를 가졌던 내 안의 길에서 밀어 올
렸던 꽃대,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렸다. 아직도 재촉할 희
망이 있는가.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 더욱 비어 있고 이제 우듬지
에 닿았던 유두가 조금씩 빈틈을 가지지만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감상]
유년의 기억과 맞물려 사춘기 소녀의 심리가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도는 언니의 브래지어에서 '공허'를 발견한 것에 있습니다. 무언가에 채워지기 위해 서두르는 재촉은 그만큼 어딘가 공허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가슴이 자라는 것을 '분홍빛 꽃'으로 보는 시인의 직관 앞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 떨리는 입술이 한때 햇살처럼 그녀의 텃밭에 내리던 첫사랑을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