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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죽변에 가서 - 임동윤

2004.07.20 12:00

윤성택 조회 수:1342 추천:187

『함박나무 가지에 걸린 봄날』/ 임동윤/ 《문학과경계사》시인선 (근간)

        
        다시 죽변에 가서

        새벽부터 쏟아지는 장대비는 그치지 않고
        내항에는 흔들리는 통통배 몇 척
        낮은 슬레이트 지붕과 뒤집히는 방파제
        허물어진 바다는 보이지도 않는다

        미친개처럼 날뛰는 파도
        대쪽 같은 빗발은 더욱 휘몰아치고
        차츰 바다로 기울어지는 간이주점 하나
        낡은 간판 위에 내걸린 등불이
        빗줄기에 지워졌다가 다시 불을 켠다

        가마솥마다 펄펄 넘치는 해장국들
        뜨거운 국물 위엔 적의가 서려 있다
        떠나면 잊혀진 이름으로 남을지라도
        푸른 항해의 꿈은 늘 허전하고
        몇 잔의 소주로 젊음을 저당 잡히는
        이마마다 실핏줄 내비치는 저 남루
        
        사는 일이 그물코 꿰는 일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가마솥 가득 생선뼈가 삶겨서
        오직 한 그릇 얼큰한 탕으로 눈뜰 때쯤
        해일에 깔려서 무너지는 간이천막이여

        슬레이트 낮은 지붕이여
        부두의 허약한 부분들이 무너져 간다
        깃털 젖은 갈매기는 선창가로 숨고
        뒤집히는 파도 방파제를 넘어올 듯
        부두 가득 넘쳐나는 물보라를 헤치고
        밤새도록 나는, 아픈 추억의 그리운
        시간들을 따뜻한 얼굴들로 지피고 있다

        
[감상]
폭풍 속의 바다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시입니다.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바라보며 자연에 대한 순응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뱃사내들의 지난함이 흑백영화처럼 펼쳐집니다. 일찍이 칸트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암호를 해독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되는 성찰은 세속에 대한 극복의지가 되고, 정신의 깊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네 삶이 늘 '낡은 간판 위에 내걸린 등불'처럼 '빗줄기에 지워졌다가 다시 불을' 켜는 것이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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