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이경교/ 《문학과창작》2004년 여름호
홍시
이름이 붙여지기 전부터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 왔는지 모르네
열매는 왜 제 몸의 불을 끄지 못하고
늦은 밤의 가로등을 대신하여 서 있는 걸까
나도 언젠가 내 몸의 불을 켜놓고 싶던
날들이 있었네
어둠 속에 잠긴 길을 불러내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기억이 있네
젖은 몸을 말리는 동안, 저 열매는
제 몸의 문 안으로 길을 불러들이네
열매는 지워진 길들이 빨려 들어간 입구
제 체온으로 추운 몸을 덥히는 사이
마침내 뜨거운 이름을 얻었으니!
열매는 주변까지 벌겋게 열을 전도하네
늦은 밤의 가로등을 대신하여
불화로 하나씩 가슴에 품고
내가 그 곁을 맴도네
[감상]
나무의 열매를 '불빛'의 것으로 바꿔낸 시는 종종 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는 시적 자아의 적절한 개입과 '길'에 대한 모색이 아름답군요. 특히 '몸의 문 안으로 길을 불러들이네'와 같은 표현이 탁월합니다. 누군가의 시처럼 감나무에 전입신고하고, 감나무 속 발전소에 마음의 전기를 잇대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