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리의 식사」/ 황병승/ 2003년 『파라21』로 등단
이파리의 식사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당신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런데 참 어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두 번 잠에서 깨어났어요
창가의 제라늄이 붉은 땀을 뚝뚝 흘리는 여름 오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인형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언제부턴가 누렇게 변한 좌변기,에 앉아 열심히 삼십세를 생각하지만 개운하지 않아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저 제라늄 이파리 어쩌면 시간의 것이에요
사람들과 방금 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는 날들
베란다에 서서 우두커니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놀던 아이들이 지워지고
꿈속의 시계 피에로 들쥐들이
어느새 미끄럼들을 차지하는 사이......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외로운 외야수를 생각해요
느리게 느리게 허밍을 하며. 오후 네 시,
바람은 꼭 텅 빈 짐승처럼 울고
살짝 배가 고파요
[감상]
시도 물방울무늬 원피스처럼 유행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만고만하고 매끈한 시에서 오는 안정감은 어찌 보면 익숙함입니다. 그래서 새롭다와 익숙함, 그 사이에서 시는 마땅히 남들이 내지 않는 목소리의 신선함에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가 주목해야할 듯 싶고요, 세세한 비유에 대한 정교함보다는 선 굵은 틀에서의 거침없는 표현들이 시선을 붙듭니다. '외로운 외야수', '관계'라는 이름의 투수가 호투하고 있는 요즘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