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이 지는 자리」/ 정끝별/ 『현대시』2004년 8월호
살구꽃이 지는 자리
바람이 부는 대로
잠시 의지했던 살구나무 가지 아래
내 어깨뼈 하나가 당신 머리뼈에 기대 있다
저 작은 꽃잎처럼 사소하게
당신 오른 손바닥뼈 하나가 내 골반뼈 안에서
도리없이 흩어지고 있다
꽃 진 자리가 비어간다
살구 가지 아래로 부러진 내 가슴뼈들이
당신 가슴뼈를 마주보며 꽃 핀 자리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
지는 꽃잎도 저리 인연의 자리로 쌓이고
문득 바람도 피해간다
누구의 손가락뼈인지
묶였던 매듭을 풀며 낱낱이 휘날리고 있다
하얗게 얼룩진 꽃 그늘 아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부쳐준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읽으며
[감상]
살구꽃 흩날리는 날, 조금만 실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뢴트겐의 X선처럼 보였을까요. 검은 가지들 사이로 나부끼는 살구꽃은 추억을 투시하고 뼈를 반사해 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X선에 의해 나타난 뼈들은 빛의 파장에 의해 그늘 진 몸 속 풍경입니다. 그러니 살구꽃 진 자리의 그림자도 어쩌면 당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것은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의 표현에 있는데, 이 짧은 은유적 배치가 한 권의 연애소설보다 더 명징해 보입니다. 이 시가 오늘, 손만 대어도 파르르 떨렸던 청춘을 처방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