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폐허」/ 성미정/ 『현대시학』2004년 8월호
시인의 폐허*
어느 날 책을 정리하여 갑자기
시를 쓰고 싶은 마음과 시에 대한 열정에게
트렁크 가득 주고 나니
남은 것은 수경야채 입문과 베란다 가든
그의 도자기 책과 차 관련 서적
이걸로 무슨 시를 재배하고 우려낼 수 있으랴
이제 그는 아끼는 책들의 제목을
나직이 불러주지도 않고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느낌에 대부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어쩌면 이제 시인은 시인의 시인과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시인 또한 하나의 환영
속에서 사실 다른 시인이 시인을 꿈꾸고 있을지도
그 꿈 또한 어지럽고 지리멸렬한
서로 만들어진 낡은 트렁크
하나를 두고 한 말일 뿐일지라도
* 시인의 폐허 :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에서 제목과 모티브를 빌려옴.
[감상]
제 주위에 여행과 詩가 같은 거라고 믿는 시인이 있습니다. 여행가방을 꾸리고 멀리 낯선 것들과 조우했을 때에만 詩가 말을 걸어온다는 것이지요. 이 시는 그런 미묘한 감정의 틈새를 보여줍니다. 트렁크에게 시에 대한 열정을 넣었으나, 막상 돌아와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했을 때의 찹찹함. 또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詩를 꿈꾸며 '낡은 트렁크 하나'에 기대를 거는 것. '어쩌면 이제 시인은 시인의 시인과/ 함께 살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내 안의 시인을 달래기 위해, 나는 또 얼마나 여행을 꿈꿔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