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의 病歷>/ 이기선 / 《시와사람》 2004년 가을호
삼십 대의 病歷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
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
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
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
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
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
이었다
[감상]
서른 살이 되어본 적 있습니까? 이미 지나쳤거나, 다가올 것이거나 그 한 가운데 있거나 서른 살은 그 자체가 병(炳)일지 모릅니다. 이 시는 그런 서른살의 분위기와 가을, 그리고 낯선 이와의 조우, 일기, 사랑을 간결한 필치로 보여줍니다. 여러 시를 읽다보면 눈에 착 감겨 들어오는 시가 있습니다. 그런 시를 대할 때면 항상 문장 속에서 나를 찾곤 합니다. 그래서 소통은 당신에게로 건너간 나의 감정입니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서른 살이 되었고 몇 해간 뜬눈일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겠지요.
산통 없이 출산을 할 수 없듯이 새로운 시절을 향하는 관문에는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진리도 따를 것이구요.
그래서 앓을 만큼 호되게 앓고 나면(病)
오색 찬란하게 밝게 빛나는(炳),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려도 좋을
신나는 시절도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