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강연호 / 《현대시》 2004년 9월호
냉장고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지난 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
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
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
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
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
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
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텐데
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
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
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
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
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
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
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
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이 이렇다
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감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냉장고, 그 냉장고가 농수로에 버려져 있습니다. 이 시는 냉장고가 있어야할 상황과 공간에 대한 입담이 재미있습니다. 시적 정황의 능청스러움도 독특하고요.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화된 일상에서 냉장고가 말해주는 메시지는 이렇듯, 치매와 같은 상식의 집착을 말해줍니다. 냉장고는 냉장고다워야 한다는 획일화된 생각 너머, 또 당신의 삶은 어떤가 하고 반문을 던지는 것만 같습니다.
너무 오래 뜸하셔서 헤이리행사로 바쁘신 줄은 알았지만
그래서 앓아 누우신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짜짠~ 하며 등장하셔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저으기 안심도 했구요.
이 시를 보니
작년인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문비냉장고>(맞나요?)가
떠오릅니다. 좋은시 올려주시는 족족 양식 삼아 열심히 읽겠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