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민박, 편지2」/ 김경주/ 『대한매일』 2003년 신춘문예로 등단
폭설, 민박, 편지2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밴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새. 나무 . 별.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맬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만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만 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자하나 눈발에 푹푹 묻혀 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는 것을
[감상]
올 4월쯤 '폭설, 민박, 편지'를 '좋은시'에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 두 번째 이야기인 셈입니다. 어느 겨울 바닷가 민박집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에 흠뻑 젖게 되는군요. 시는 가슴으로 쓰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되는 시입니다. 쓸쓸한 정서를 누가 이처럼 치열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문장마다 비유가 나름대로 빛이 나지만, '심장'이라는 상징에 묘한 끌림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만 하다가/ 죽는다…', 다시 한번 되 읽어보게 되는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