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골목에서」 / 강윤후/ 1991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옛 골목에서
햇빛이 흐르는 대로 길이 트인다
나는 술래라도 된 듯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어린 날의 기억들은 꼭꼭 숨어 버려
머리카락조차 들키지 않고
블록 담벼락은 글자가 씻겨 나간 필사본 같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비가 이 골목을 지나갔을까
내 오래된 수첩도 젖고 마르기를 거듭하여
막다른 기억들로 얼룩져 있다
지워진 글자를 판독하듯
담벼락에 손바닥을 얹고 걷는다
차단된 세월의 저편에서 다른
손바닥이 담벼락을 쓸며 지나간다
나는 누군가와 손바닥을 맞댄 채 걷는다고
상상해 본다 문득 햇빛이 흐름을 멈춘다
모르는 글자들이 손바닥을 통해
몸 안 가득 주입된다
나를 따르던 그림자가
내게서 손을 떼고
저 혼자 간다
[감상]
오래전 떠나온 정든 곳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시는 그런 감성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냅니다. 지나와 생각하면 기억은 스스로의 해석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사실은 추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아름답게 편집되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차단된 세월의 저편’ ‘다른 손바닥’은 어쩌면 과거 또 다른 화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니 저 혼자 떠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기억은 또 얼마나 될까요. 잊고 있었던 것들이 문득 찾아올 것 같은 날입니다.
'기억은 스스로의 해석에 가깝다' 말씀, 저도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
추워지는 날씨가 싫지 않은 날입니다. 따뜻한 가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