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전다형/ 2002년 ≪국제신문≫으로 등단
달팽이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기수였다 평생을 독방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외출을 했다 그의 따뜻한 집이 슬픈 감옥이었다 절벽 앞에는
겹겹의 어둠이 보초를 섰다 온몸으로 푸른 감옥을 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집이 있어 짐이 되었다 창문도 없는 감방에서 제 살을 파먹으며 젖
은 슬픔을 말렸다 비가 감옥의 문을 열었다 굳게 닫힌 귀를 열고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온몸으로 바닥을 읽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마른 길
에게 부드러운 속살 다 파 먹히고 겨울 무논에 빈 껍질로 둥둥 떠 있었다 네 어
미의 어미가 그랬다 살아서 감옥이던 집 네 어미의 자궁을 열고 네가 태어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집 슬픈 감옥을 죽어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감상]
이 시는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되기’가 잘 실현된 작품입니다. ‘그=달팽이’라는 결론적인 것이 아니라, 달팽이인 ‘그’에게로 통과되는 의식이 하나의 시적운동인 셈입니다. 그와 달팽이의 몸이 서로 영향 받고 공유되는 지점에 새로운 시각을 걸쳐놓는 것, 이것이야말로 ‘발견’인 셈입니다. 이 시의 결론이 말해주듯 그는 더 이상 ‘달팽이’도 아니며 ‘무기수’도 아닌 새로운 존재입니다. 이렇듯 좋은 시는 인간 중심의 가치로 환원되는 것보다 더 너머에 있는 시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