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1」/ 황상순/ 《문학과창작》2004년 겨울호
흔적 1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 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가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감상]
교통사고 현장을 표시해둔 흰 선. 어쩌면 그런 자세로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흔적을 이 시는 ‘탈피’의 시선으로 들여다봅니다. 몸이라는 허물을 벗는 것이 죽음이라면, 나비라는 상징은 죽음과 탄생의 어떤 표징이겠지요. 발견에 이은 상상력이 잔잔한 감동인 시입니다.
<삼중충돌>
네거리 길바닥에
난데없이
하얀 직사각형 세 개가 삐뚜름하게 그려졌다
그 안엔 제각각
숫자가 써 있고 화살표도 있다
크기가 다른 사각형들은
서로 포개진 부분과 맞닿은 부분이
교집합을 나타내는 다이어그램 같다
아니
마주보고 있는 두 얼굴의 그림이 잠시 전엔
건배를 하던 와인잔처럼 보였듯이
합집합을 나타낸 그림 같기도 하다
직사각형 위에 얼룩진 핏자국 선명한데
술취한 친구들이 한바탕 웃음으로 어깨를 겯고
파도타기하던 출렁임 속에서
날이 선 유리조각들 유난히 반짝거리고
죽은 채 공원에 버려진 고양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