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필> / 이상국/ 《동서문학》2004년 가을호
리필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상]
2005년 을유년 새해가 어느덧 20여 일이 지났군요. 내가 살아온 시간들, 내가 느꼈던 사랑, 내가 언젠가 맞이해야할 죽음이 이 시 한 편에 새롭게 정의됩니다. 좋은 시인은 예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랍에서는 시인을 예언가의 뜻인 ‘vate'라고 한다더군요.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이 시가 보여주는 직관은 사실 너머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리필은 무언가를 다시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 또한 언젠가 비워둔 삶을 다시 사는 것일테지요. 70평생이라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로 살아가면서, 우연한 사람을 필생 인연이라고 믿으면서.
작년 겨울 어느 때처럼
땅에 눈이 리필되어 제 마음도, 모든 분들의 마음도 가득가득 채워지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