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엽 카메라> / 김정미/ 《문학과창작》 2005년 봄호
활엽 카메라
가을 볕 옹송그린 굴참나무 숲에서 셔터 소리가 들린다
늠름한 참나무 초록빛 이파리에 누가 야금야금 작은 구멍을 내고 있다
겉늙은 피사체도 젊게 찍어내는 광합성 초박형 렌즈라?
(오늘 운세에 횡재수가 있더라니)
한쪽 눈을 감아야 눈을 뜨는 파인더, 점멸하는 기억의 붉은 창을 연다
놀랍게도 작은 잎사귀 한 장에 커다란 굴참나무 한 그루 들어 있다
갈래갈래 찢어진 고랑을 따라
무수한 팔과 다리들이 허우적거리며
까마득한 벼랑 끝 폭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쩍쩍 갈라진 껍질에도
흰털 돋아난 잎맥에도
빽빽하게 씌워진 매뉴얼
읽어도 알 수 없는 비책들이
바싹 마른 갈잎 필름에 둘둘 말려 있다
그 순간이었을까?
외눈박이 바람이 번쩍 플래시를 터뜨리며
굴참나무 뻥 뚫린 뼛속을 환히 비춘다
[감상]
활엽수의 풍경을 사진을 찍는 카메라와 연관짓는 것이 이 시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이러한 상상력을 나름대로의 시적논리로 개연성 있게 배치한 것도 눈길을 끕니다. 확대와 축소를 오가며 이미지를 재생하는 솜씨는 ‘작은 잎사귀 한 장에 커다란 굴참나무 한 그루 들어 있다’란 직관에 머물기도 하고요. 재미있게 읽히는 요인 중에는 시적 자아의 목소리 개입도 한몫을 하는군요.
"한쪽 눈을 감아야 눈을 뜨는 파인더, 점멸하는 기억의 붉은 창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