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순> / 이병일/ 《다층》 2005년 봄호
죽순
수상하다,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대롱이 길고 굵은 놈일수록 순을 크게 뽑아 올린다 깊숙이 박혀있던 뿌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푸른 힘을 밀어내고 있다 댓잎이 쌓여있는 아랫도리마다
축축이 젖어 뾰죽 튀어나온 수만의 촉이 가볍게 머리 내밀고 뿌리는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난, 어디로부터 나온 몸일까?
대나무 숲, 황소자리에서 쌍둥이자리로 넘어가는 초여름이다 땅속에서는 어둠
을 틈타 안테나를 내밀 것이다 난 초록의 빛을 품고 달빛 고운 하늘에 뛰어오를
것이다 대나무 줄기가 서로 부딪쳐 원시의 소리를 내는 아침, 날이 더워질수록
물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초승달이 보름달을 향해 갈수록,
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에 닿을 때까지 단전에 힘을 줄 것이다 대나무향
이 하얗게 깔리는 밤, 튀어나온 뿌리 마디마다 젖무덤처럼 불어올라 포개져있는
껍질을 열어젖힐 때, 댓잎에 미끄러진 햇빛이 푸른 옷을 던질 것이다 나는 마침
내 문을 열었다
[감상]
죽순이 커가는 과정을 ‘나’로 대입하여 풀어내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시작, 전환, 상승, 결구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구도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고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죽순의 이미지는 화자의 행위와 감춰졌다가 보였다가 반복되면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나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맺음이 인상적인 것은, 주제와 더불어 과거형이 가져다주는 묘한 여운 때문은 아닌가 싶군요.
짧게 달아놓은 감상도...
비오는 날이군요 좋은밤 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