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 대한 기억> / 서상권/ 《시안》 2005년 봄호 신인상 당선작 中
헌책방에 대한 기억
'信友書店'이란 간판이 달린 헌책방은
읍 차부 옆에 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간판 글씨의 일부를 비바람이 벗겨 먹어
'信久書店'처럼 보이기도 했던,
友와 久가 허공에서 샅바싸움을 벌이는 동안
나는 중 3 주제에 낡은 시집의 옛 철자법을
해독하기 바빴다 풀풀 풍기는 좀 냄새가
자음 모음을 행간의 오솔길로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툭툭 불거져 나오는 토속어는
날 퀴퀴한 헛간 속에 가두곤
게으른 노을빛 울음*을 울게 했다
반백의 책방 주인은 늘 나무 주판알에
손가락을 넣고 살았다
내 훔쳐보기를 표나게 제지하진 않았지만
책 속에서 알밤을 줍거나 동전을 떨어뜨릴 때마다
수시로 시침을 뒤통수에 쏘아댔다
책방 주인과 외상없는 눈치싸움을 하는 사이
60년대 말은 못물처럼 저물어 가고 있었다
쓸만한 책 한 권 눈치 안 보고
책가방 속에 넣는 날은
책가방이 휙휙 날아다녔다
책 속에서 누군가의 추억을 훔친 날
가슴 속에서 콩 튀기는 소리가 났다
책갈피에서 나온 빛바랜 쪽지 하나가
내게 상상의 오르가슴을 일으키게 했다
밤새 생각이 종이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녔다
불면은 그 주위를 수줍게
수줍게 비추는 달빛이었다
*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변용
[감상]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이 통했던 시절을 떠올려보게 하는 시입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읽던 시인의 중학시절은 배우고 싶어 하는 이에게 관대했던 시대였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눈길이 지났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 그 설렘은 사춘기 감성인 ‘오르가즘’으로 연결되어 아득한 추억으로 자리합니다. 추억이 사라지는 것은 동시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지 않을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문학이 진정 그런 추억을 연장해온 것은 아닌지요. 잔잔한 묘사가 돋보이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