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 / 한정원 / 2005년 ≪시와세계≫ 봄호
문병(問病)
서른네 개의 역을 지나면서
문이 열리고 닫히고
빗방울이 들이치고 어둠이 번진다
나도 입을 떼고 저녁을 중얼거린다
살갗처럼 가닿는 전철문의 개폐 소리
삐걱, 뼈가 맞추어지고
삐걱, 뼈가 어긋나고
비상구의 고무 붕대가 풀려나간다
앞자리 귀가 어두운 노부부는
눈빛만으로 고요하게 앉아 있고
손짓만으로도 백석 역에서 나란히 내린다
중환자실에 얹어놓은 기억들이 눈을 맞추지 못하고
딴전을 피우고 있다
빨리 찾아내어라, 기억의 사다리들아
화정역, 엑스레이(X-ray)처럼 속이 들여다보이는
나무와 집의 골격들이 눈 시리다
지하철도 지상이 궁금하면 고개를 내밀고 달려나온다
전망 좋은 7층 2인실로 올라갈 것이다
아직 통과해야 할 다섯 개의 역이
깊게 파인 정강이를 보이며 서 있다
[감상]
지하철로 문병을 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잔잔하게 이어집니다. 곳곳에 순간적으로 응결되는 표현이 있는데 ‘저녁을 웅얼거린다’, 나무와 집의 ‘골격들이 눈 시리다’에 눈길이 가는군요. 다분히 암시적인 ‘서른네 개’도 그렇고, 지하철 객차연결을 ‘뼈’로 보는 시선도 돋보입니다.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지하철을 통해서 ‘죽음’을 상징화 시키는, 문병의 의미가 새롭습니다.